프로모션 로딩 중...
내가 떠난 후, 망한 그녀
회사 자금 조달에 성공하면 대표이사인 와이프가 사람들 앞에서 나와의 관계를 공식적으로 발표하기로 했다. 그런데 발표 당일, 갓 입사한 그녀의 후배가 갑자기 무대에 올라가서 득의양양하게 말했다. “대표님, 우리 둘 사이를 이렇게 빨리 외부에 발표하는 건가요? 대체 저를 얼마나 아끼시길래...” 그 말에도 그녀는 반박은커녕 오히려 미소를 지으며 후배를 회사의 중요한 프로젝트에 배치해 스펙을 쌓게 해주었다. 순간, 현장의 모든 직원들이 지붕이 떠나갈 듯 박수를 치며 두 사람이 천생연분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여러 해 함께 일해온 동료가 말없이 서 있는 나를 보고 일부러 낮은 목소리로 귀띔해 주었다. “한정훈, 너 눈치 빠르잖아. 분위기 좀 띄워 봐.” 하지만 나는 나서지 않았다. 대신 프로젝트 책임자 명패를 후배 쪽으로 밀며 너그럽게 말했다. “프로젝트에 참여만 하는 건 네 능력을 너무 낮추는 거, 아니야? 내 프로젝트 책임자 자리도 너희 공식 발표 선물로 줄게!”
챕터 (1)
第1章
회사 자금 조달에 성공하면 대표이사인 와이프가 사람들 앞에서 나와의 관계를 공식적으로 발표하기로 했다. 그런데 발표 당일, 갓 입사한 그녀의 후배가 갑자기 무대에 올라가서 득의양양하게 말했다.
“대표님, 우리 둘 사이를 이렇게 빨리 외부에 발표하는 건가요? 대체 저를 얼마나 아끼시길래...”
그 말에도 그녀는 반박은커녕 오히려 미소를 지으며 후배를 회사의 중요한 프로젝트에 배치해 스펙을 쌓게 해주었다.
순간, 현장의 모든 직원들이 지붕이 떠나갈 듯 박수를 치며 두 사람이 천생연분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여러 해 함께 일해온 동료가 말없이 서 있는 나를 보고 일부러 낮은 목소리로 귀띔해 주었다.
“한정훈, 너 눈치 빠르잖아. 분위기 좀 띄워 봐.”
하지만 나는 나서지 않았다. 대신 프로젝트 책임자 명패를 후배 쪽으로 밀며 너그럽게 말했다.
“프로젝트에 참여만 하는 건 네 능력을 너무 낮추는 거, 아니야? 내 프로젝트 책임자 자리도 너희 공식 발표 선물로 줄게!”
제1화
회의실에서 내가 명패를 지찬우에게 건네자 모두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동안, 이 프로젝트를 위해 나는 밤낮 가리지 않고 심혈을 쏟아부었다. 그 탓에 몇 번이나 저혈당으로 쓰러질 뻔한 적도 있었다.
곁에 있던 동료들이 하나둘 박수를 치고 환호하기 시작하자 회의실 분위기가 절정으로 치달았다. 모두들 나를 보고 대인배라고 칭찬하며 대표 곁을 오래 지켜온 충신답다고 했다.
그런데 무대 위에 서 있는 정은서만은 표정이 애매모호했다. 입술을 꽉 다문 채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당혹스러워하는 정은서의 눈빛을 보니 조금 우스꽝스러웠다.
정은서는 사내 커플이라는 타이틀을 정말 싫어했다. 그래서 지난 7년 동안 우리는 비밀결혼을 유지해 왔다. 그동안 내가 끊임없이 공개하자고 졸랐지만 극구 꺼렸다.
드디어 이번 기회를 빌려 정은서가 마침내 공개하는 줄 알았지만 지찬우에게 이렇게 쉽게 빼앗길 줄은 몰랐다.
이제 정은서가 공식 발표를 하든 말든, 나는 관심이 없었다.
“그럼 특별한 일 없으면 먼저 가볼게요. 다들 즐겁게 놀아요.”
나는 정은서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회의실을 나왔다.
이번 자금 조달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맡은 이 프로젝트의 진행 상황이 좋고, 잠재력이 뛰어나 협력사가 추가 투자를 결정했기 때문이었다.
프로젝트의 핵심 특허는 내 명의로 되어 있었다. 내가 매일같이 회사를 위해 최선을 다해 뛰어다녔기에 지금의 성과가 나온 것이었다.
그런데 정은서가 나를 안중에도 두지 않는다면, 나도 더 이상 그녀를 도와주는 어리석은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먼저 실망하게 한 것은 정은서니까.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주차장에 도착했다.
차에 올라타니 조수석에 99송이의 빨간 장미 꽃다발이 놓여 있었다.
오늘 정은서가 나와의 관계를 공식적으로 발표하겠다고 해서 정말 기뻤다. 그래서 장미도 사고 촛불 디너 장소도 예약해 두었다.
하지만 그토록 기다렸던 순간이 결국에는 지찬우에 대한 정은서의 지나친 애정만 과시하는 자리가 되어버렸다. 너무 우스워 말이 안 나올 지경이었다.
마음이 식은 채 차 시동을 걸었다. 차가 막 출발하려는 찰나, 전조등 불빛 아래 지찬우의 모습이 갑자기 나타났다.
만족한 듯 뿌듯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지찬우는 손가락으로 명패를 빙글빙글 돌리며 큰 소리로 자랑했다.
“한정훈, 오늘 원래 너와 정은서의 공식 발표 자리 아니야? 그런데 내 한마디에 정은서가 마음을 바꿨어. 정은서가 그러는데 내가 이 프로젝트 얼마간 담당하면 승진도 시켜 주고 월급도 올려주겠다고 하더라고? 근데 듣자 하니, 넌 3, 4년째 승진 못 했다며? 화 안 나?”
창백하고 야윈 얼굴에 악의가 가득 담겨 있는 지찬우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쪼잔하기 짝이 없는 지찬우의 모습에 나는 웃음이 났다.
예전부터 지찬우는 사사건건 도발을 해왔다. 그때마다 화가 나서 정은서한테 말하면 정은서는 오히려 내가 일부러 지찬우를 저격한다고 오해했다. 그 일로 나와 정은서는 자주 다투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지찬우라는 인간에게 신경 쓸 가치조차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내 딱딱거리는 하이힐 소리가 들려왔다.
순식간에 표정이 확 바뀐 지찬우는 명패를 손에 쥔 채 내 차 창문에 매달려 다급히 소리쳤다.
“정훈 선배, 화내지 마세요. 은서 선배가 저를 선배님 밑에 둔 건 저한테 사적인 감정이 있어서가 아니에요. 그러니 제발 오해하지 마세요. 제가 정훈 선배 곁에서 배우고 싶다고 먼저 말한 거예요. 선배, 저 별로 마음에 안 드시면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지 않겠습니다. 프로젝트 책임자라는 중요한 자리를 제가 어찌 감히 함부로 넘보겠어요? 당연히 선배님처럼 경력이 깊으신 분이 맡으셔야죠!”
제2화
비굴한 어조로 한마디 한 지찬우는 마치 나에게 혼쭐이 난 사람처럼 조심스럽게 내 쪽으로 명패를 살짝 내밀었다.
정은서가 다급히 내 앞으로 몇 걸음 다가오더니 손에 든 가방으로 앞 유리를 내리쳤다.
쿵 하는 굉음과 함께 날카로운 목소리로 나를 꾸짖었다.
“정훈아, 찬우가 이렇게 애원하는데 차에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면 어떡해? 안 내리고 뭐 해? 그러다가 만약 찬우가 차에 치이면 어쩔 건데? 이게 직장 내 괴롭힘인 거 몰라?”
나는 비웃듯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차 창문을 내린 뒤 프로젝트 책임자 자리 따위 필요없다고 말하려고 했다.
지찬우는 내가 정말로 명패를 되찾아 갈까 봐 당황한 듯 손가락으로 리본을 꽉 움켜쥐며 명패를 뒤로 빼냈다.
그러더니 갑자기 배를 움켜쥐며 허리를 굽혔다.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숨이 끊어질 듯 배가 아프다고 외쳤다.
연기인 게 뻔히 보일 정도로 오버스러웠지만 이런 연기에 정은서는 당연히 속아 넘어갔다.
나와 따지는 것도 잊은 듯 급히 지찬우를 부축하더니 가방에서 위장약을 꺼내 지찬우에게 먹였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고 당황한 기색으로 나에게 소리쳤다.
“정훈아, 안 도와주고 뭐 해? 찬우 병원 좀 데려가야 할 것 같아. 네가 차 좀 운전해.”
나는 하도 어이가 없어 그냥 차를 몰고 가버리려 했다.
하지만 정은서는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내 차 앞을 가로막았다. 내가 본인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차에 치이더라도 내 앞길을 막겠다는 태도였다.
정말 우스웠다.
예전에 내가 고객 접대로 술을 하도 많이 마셔 위출혈이 나서 변기에 피를 토해도 정은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위장약이나 좀 챙겨 먹으라는 말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지찬우가 그저 꾀병을 좀 부렸을 뿐인데 늘 냉철하고 침착하던 정은서가 목숨까지 내던질 기세로 허둥지둥 달려들었다.
나도 모르게 미간을 찡그렸지만 두 사람을 어쩔 수 없이 병원으로 데려갔다.
병원에서 의사가 지찬우에게 이상이 없다고 하자 정은서는 그제야 안도한 듯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눈에는 지찬우를 아끼는 감정이 가득했다.
두 사람의 비극적인 연기 따위 관심이 없던 나는 바로 뒤돌아서려 했다.
그런데 정은서가 급히 복도까지 쫓아와 내 팔을 잡아당겼다.
그 모습에 나는 또다시 인상을 찌푸렸다. 지찬우가 나 때문에 아픈 거라고, 나를 향해 또 욕지거리를 하려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 순간, 정은서는 회사 명패를 내 목에 걸어주며 구겨진 내 정장까지 정리해 주었다.
그러고는 나지막이 말했다.
“정훈아, 찬우가 농담하기 좋아하는 거 알잖아. 공식 발표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어, 좀만 더 기다려 봐. 프로젝트 책임자는 중요한 자리야. 쉽게 맡는다, 안 맡는다 하지 마. 이번에는 내가 봐줄 테니까 다시 그런 말 하지 마.”
나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응’ 하고 대답했다.
고개를 들어 한참 동안 나를 바라보던 정은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피식 웃더니 구겨진 상자를 내 앞으로 내밀었다.
“정훈아, 네가 조수석에 놓아둔 장미 봤어. 마음에 들어. 나중에 그 꽃집에 있는 꽃병에 꽂아줄래? 사실 나도 너한테 줄 선물을 준비했거든.”
나는 이것이 정은서의 전형적인 수법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야말로 병 주고 약 주는 식이었다.
정은서의 손에 있는 상자를 보자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한 달 전쯤 지찬우가 올린 SNS 글이 생각났다.
그때 지찬우는 정은서가 선물한 넥타이에 기름이 묻어 상자째로 쓰레기통에 버렸다고 한탄하는 척하며 실제로는 자랑을 늘어놓았다.
정은서는 그 글에 열 개 더 사주겠다는 댓글을 달았다.
나는 정은서 손에 있던 선물 상자를 받아 열어 보았다.
안에는 짝퉁 넥타이가 들어 있었다. 가장자리를 살짝 만져보니 색도 이미 바랜 상태였다. 심지어 영수증조차 들어 있었다.
지찬우에게 명품 넥타이를 선물할 때는 전혀 아까워하지 않았지만 내 선물은 그저 짝퉁으로 대충 때웠다.
나도 굳이 들춰내고 싶지 않아서 적당히 둘러댔다.
“알았어. 특별한 일 없으면 이만 가볼게.”
복도 모퉁이를 도니 쓰레기통이 보이자 나는 망설임 없이 선물 상자를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그러고 나서 휴대폰을 꺼내 계속해서 나에게 러브콜을 보내던 테크 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귀사 직원 채용 요청, 수락하겠습니다.”
이 테크 회사는 세계에서도 이름만 말하면 알아주는 대기업 중 하나로, 몇 년 동안 나를 영입하기 위해 끊임없이 ‘러브콜’을 보내왔다.
제3화
하지만 정은서 곁에 있기 위해, 그리고 그녀의 꿈을 이루기 위해 줄곧 정중히 거절해 왔다.
전화기 너머로 인사 담당자는 회사 복지가 얼마나 좋은지, 연봉은 얼마인지, 그리고 나 같은 인재를 얼마나 환영하는지 쉴 새 없이 말했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차를 회사 입구까지 몰고 와 있었다.
한 시간에 달하는 통화 기록을 보자 휴대폰을 쥔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한때 나는 정은서를 위해 당장이라도 입사할 수 있었던 회사 임원 직위를 포기하고 그녀와 함께 완전히 백지상태인 처음부터 시작했다.
그동안 몸을 혹사해 가며 회사를 위해 밤낮으로 뛰어다니며 정신적으로도 늘 긴장한 탓에 몸과 마음 모두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정은서와 겨우 뭔가 해냈다고 생각했을 때, 정은서의 마음은 어느새 다른 곳으로 향해 있었다.
이제는 오직 나 자신만을 위해 살고 싶었다.
잠시 생각한 후, 프로젝트 협력사에도 메시지를 보내 프로젝트 책임자가 교체되었음을 알렸다.
협력사는 나에 대한 신뢰 때문에 이 프로젝트에 흔쾌히 투자하기로 했다.
그러니 이 자리에서 물러나려고 결정한 이상, 당연히 그들에게도 알릴 의무가 있었다.
메시지를 보낸 후 다음 날 비행기표를 끊고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옷장 맨 아래에서 코트를 꺼내다가 맨 밑에 눌려 있던 사진첩이 덩달아 펼쳐지면서 나와 정은서의 사진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바로 8년 전, 나와 정은서가 막 사귀기 시작했을 때 찍은 사진이었다. 풋풋했던 우리 두 사람은 서로 기대기만 해도 부끄러워했다.
사진첩을 집어 들고 한 장 한 장 넘겨보았다.
생각해 보면 이 모든 사진은 정은서가 먼저 찍자고 한 것이었다. 일상생활을 기록하고 함께 겪었던 고생을 이렇게 남겨두었다가 나중에 나한테 제대로 보상하겠다고 했다.
정은서와 나는 고난을 함께 겪으며 힘든 시절을 같이 보냈다.
좁은 월세방에 웅크리고 앉아 불법으로 다운받은 영화를 보기도 했고 섣달그믐날에는 고기 한 점을 두고 서로 양보하기도 했다.
하지만 허리를 졸라매던 순간들조차 나에게는 행복이었고 앞으로 나아가는 원동력이었다.
그렇게 사진 속 사람들은 점점 화려한 옷차림과 배경으로 바뀌었지만 사진 찍는 횟수는 점점 줄어들었다.
며칠에 한 장, 한 달에 한 장, 그리고 일 년에 한 장 간격으로 찍다가 지찬우가 나타난 후로는 더 이상 새 사진이 없었다.
정은서와 나의 교류는 연인 간의 대화에서 점차 상사와 부하 직원 사이의 업무적인 보고가 되었다.
언제부터인지 정은서는 내가 한 끼를 거르든, 고객과의 접대로 술을 많이 마셔 위출혈이 나든, 실험하다 다치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지찬우만큼은 불면 날아갈까, 쥐면 부서질까, 모든 걸 다 바칠 정도로 아꼈다. 가벼운 위장병이 있는 지찬우를 위해 고객 접대 자리를 다 미루고 직접 식사를 챙겼다. 지찬우가 뭘 하든 오냐오냐한 탓에 이 녀석도 점점 버릇없이 굴었다.
찬밥 신세가 된 내 모습이 너무 억울해서 이유를 물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정은서는 냉랭한 눈빛으로 말했다. 우리 모두 고생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왜 나이가 들었음에도 이렇게 예민하냐면서 말이다. 지찬우만도 못하다고 비교질까지 했다.
순수하고 착한 지찬우가 우리처럼 고생하는 걸 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잠깐 그때의 추억에 잠기긴 했지만 나는 이내 정신을 차렸다. 정은서와의 사랑이 가득했던 사진첩을 바라보자 지나간 모든 게 시시해진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망설임 없이 쓰레기통에 버렸다.
계속해서 옷을 정리하고 있는데 바지 주머니 속 휴대폰이 갑자기 울렸다.
5성급 레스토랑 지배인에게서 전화가 걸려 온 것이었다.
“한정훈 씨, 예약하신 촛불 디너 시간이 30분이나 지났습니다. 10분 내로 오시지 않으면 다른 손님에게 자리를 내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나는 중식을 좋아하지만 정은서는 양식 분위기와 낭만을 좋아했다. 그래서 나는 프러포즈도 양식 레스토랑에서 했다.
오늘 공식 발표를 기념하기 위해 그녀와 촛불 디너를 즐기려고 시내에서 가장 좋은 양식 레스토랑을 예약해 두었지만 정은서는 결국 약속을 어겼다.
나는 무심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못 갈 것 같아요. 자리는 다른 분한테 내주세요.”
제4화
전화를 끊자마자 정은서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저녁에 고객사 접대가 있어서 같이 밥 못 먹을 것 같아.]
이 짧은 한마디가 오히려 신기하게 느껴졌다.
정은서는 예전에 나에게 연락하는 것에 대해 일절 신경 쓰지 않았다. 여태껏 말 한마디 없이 그냥 바로 약속을 어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 왜 갑작스럽게 이런 행동을 했는지 그 이유를 곧 알게 되었다.
바로 조금 전 지찬우가 갑자기 SNS에 올린 글 때문이었다.
사진 속 정은서는 고개를 숙인 채 진지하게 스테이크를 자르고 있었다. 배경은 바로 내가 예약했던 그 5성급 레스토랑이었다.
사진 아래에는 이런 글귀가 있었다.
[대표님은 얼굴도 예쁘고, 마음도 착한 데다 직접 스테이크까지 잘라줘요. 대표님이 잘라준 거라 유난히 더 맛있어요.]
정말 우연이었다. 지배인이 말한 다른 손님이 바로 이 두 사람일 줄이야...
나는 지찬우와의 데이트를 정은서가 왜 고객사 접대라고 거짓말했는지 따지지 않았다. 더 이상 슬프지도 않았다.
마음을 완전히 접은 나는 그저 푹 자고 싶을 뿐이었다.
씻고 난 후 몇 년 만에 처음으로 편안한 잠을 잤다.
그런데 한밤중에 침실 불이 갑자기 켜져 잠에서 깼다.
눈을 깜빡이며 간신히 밝은 빛에 적응하니 정은서가 내 침대 옆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정은서는 믿기 어렵다는 듯 눈이 휘둥그레진 채 소리쳤다.
“정훈아, 너 설마 잠든 거야?”
나는 잠이 덜 깬 눈으로 휴대폰 화면을 바라봤다.
시간은 새벽 3시, 이렇게 늦은 시간인데 정은서가 밤을 새우지 않고 돌아온 게 조금 의아했다.
예전에 지찬우가 위장병이 날 때마다 정은서는 밤새 지찬우 곁에서 간호했다. 혹시라도 재발할까 봐 밤새 마음을 졸이던 정은서가 내 앞에 서서 매우 불쾌한 듯 얼굴을 찌푸리며 투덜댔다.
“정훈아, 내가 이렇게 늦게 돌아왔는데 연락 한 번 안 해? 집에서 기다리지도 않고? 너무한 거 아니야?”
‘내가 너무하다고?’
나는 어이가 없어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
예전에 걱정돼서 전화를 하면 정은서는 오히려 내가 본인을 믿지 않는다고, 마치 스토커 같다고 했었다.
한밤중에 정은서를 기다릴 때면 미리 야식을 준비해 주기도 했고, 돌아오면 안마도 해주고 발도 씻겨줬다. 그런데 그때마다 정은서는 내가 너무 심심해 잠이 안 오는 거라며 일거리를 더 주겠다고 했었다.
그런데 예전처럼 일일이 간섭하지 않아도 이 여자는 여전히 불만이었다.
여자의 마음은 정말 알 수 없었다.
나는 ‘응’ 하고 짧게 대답한 뒤 불을 끄고 다시 자려고 했다.
그러자 정은서가 나를 밀치더니 내게 몸을 기대며 말했다.
“정훈아, 나 오늘 너무 피곤해. 세수할 물 좀 떠다 줄래?”
정은서가 가까이 온 순간 지찬우가 쓰는 남성 향수 냄새가 확 풍겼다.
코끝을 스치는 더러운 냄새에 나는 기분이 나빠졌다.
예전 같으면 정은서가 말하지 않아도 내가 먼저 그녀를 살뜰히 챙기며 잠들 때까지 달랬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냥 귀찮기만 했다.
정은서를 밀쳐낸 뒤 잠에서 금방 깬 탓에 쉰 목소리로 다소 딱딱하게 말했다.
“나 졸려. 네 일은 내가 해.”
정은서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내가 자신을 밀쳐낸 사실을 아직도 받아들이지 못한 듯했다.
한참 후, 손가락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가방끈을 꽉 쥐더니 이를 악물고 말했다.
“한정훈! 밥 한 끼 같이 못 먹은 것 가지고 나한테 이러는 거야? 정말 너무하는 거 아니야! 나라고 집에 돌아오고 싶어서 돌아온 줄 알아?”
말을 마친 뒤 화가 난 상태로 문을 박차고 나갔다. 방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열쇠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또렷이 들렸다.
예전 같으면 정은서를 붙잡으며 가지 말라고 애원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냥 불을 끄고 바로 다시 잠들었다.
다음 날 아침, 상쾌한 마음으로 기지개를 켜며 깨어났다.
아침을 준비하려고 했는데 정은서가 웬일로 집에 있었다.
예전의 정은서는 내가 달래기 전까지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화가 나면 아침 일찍 회사로 출근해 버리기 일쑤였다.
그런데 지금은 거실 소파에 단정히 앉아 있었다. 무릎 위에 정교한 선물 상자를 놓은 채 손가락으로 상자의 리본을 매고 있었다.
기척을 느낀 정은서는 고개를 들더니 내 앞으로 다가왔다. 내 손목을 잡고 상자 속 시계를 꺼내 내 손목에 채워주었다.
차가운 감촉에 나는 손목이 살짝 움찔했다.
제5화
정은서가 내 손목을 들여다보며 매우 만족스러운 듯 말했다.
“괜찮네, 사이즈도 딱 맞고 분위기도 차분하면서 내추럴하고.”
고개를 숙이니 잡지에서 본 적이 있는 시계가 내 손목에 있었다. 올해 나온 신제품으로 가격이 몇십억은 족히 됐다.
그런데 내가 손을 빼기도 전에 정은서는 내 손목의 시계를 서슴없이 벗겨내더니 손수건으로 정성스럽게 닦기 시작했다.
상자에 다시 넣으며 한마디 중얼거렸다.
“다행이다. 너랑 찬우 손목 굵기가 비슷하잖아, 너한테 맞으면 찬우한테도 맞을 거야. 찬우도 분명 좋아하겠지.”
머리를 굴리는 정은서의 모습에 나는 그저 코웃음을 쳤다.
하긴, 지찬우가 명품 시계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정은서가 이런 명품 시계를 나한테 선물할 리는 없었다.
외투를 걸친 정은서는 선물 상자를 들고 가벼운 걸음으로 현관 밖으로 나갔다.
그때 내가 팔을 뻗어 그녀 앞을 막았다. 그러고는 어제 미리 출력해 둔 서류를 꺼내 들었다.
“정은서, 이 서류에 서명해.”
미간을 살짝 찡그린 정은서는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다소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회사 가서 할게.”
나는 다시 그녀 앞으로 서류를 내밀었다.
“회사 업무 서류가 아니야. 꽤 중요한 거야, 시간 많이 안 걸려.”
깊게 숨을 들이마신 정은서는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내 손에서 서류를 뺏어 들더니 한마디 중얼거렸다.
“정말 아침부터 귀찮게 하네.”
시선이 서류로 향한 순간, 서류를 넘기던 손가락이 굳어졌다.
이 서류는 다름 아닌 이혼 합의서였다.
잠시 멈칫하던 정은서는 이내 이혼 합의서를 신발장 위에 힘껏 내리쳤다.
그러고는 비웃으며 말했다.
“한정훈, 뭐 새로운 게 있는 줄 알았더니 이번에는 이혼하자고 소동이야? 그래, 네가 큰 프로젝트 하나 해냈다고 어깨가 좀 올라갔나 본데, 나 바빠. 네 짜증과 투정 상대할 시간 없어.”
나는 계속해서 이혼 합의서를 그녀 앞에 내밀며 냉정하게 말했다.
“투정 부리는 게 아니야, 정은서. 이제 너를 놓아줄게, 너한테 자유를 주겠다고. 그럼 지찬우도 떳떳하게 네 곁에 있을 수 있잖아.”
하지만 정은서는 눈살을 찌푸리더니 내 손에 든 이혼 합의서를 가져가 구겨버렸다. 그걸로도 부족한 듯 서류를 갈기갈기 찢어 바닥에 던져버렸다. 종이조각이 공중에 흩날렸다.
그러고는 나를 가리키며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
“질투 안 한다며? 이게 질투 안 하는 거야? 한정훈, 경고하는데 다시는 이혼 얘기 꺼내지 마. 찬우를 챙기는 건 그냥 찬우한테서 예전의 우리 모습이 보여서 그러는 거야. 회사에 필요한 인재는 당연히 아껴야지. 네가 생각하는 그런 더러운 관계가 아니라고! 나도 기회 봐서 우리 둘 사이 공식 발표하려고 했었어. 그런데 너 지금 이러는 거, 얼마나 실망스러운지 알아?”
말을 마친 정은서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화가 난 채 현관문을 박차고 나갔다. 하이힐 소리가 복도에 요란하게 울렸다.
이미 예상하고 있던 결과였기에 나는 별로 실망하지 않았다.
좋게 헤어질 수 없다면 법으로 해결할 수밖에... 변호사에게 이혼 소송 서류 작성을 의뢰했다.
또한 인사팀에 사직서도 제출했다.
이내 인사팀으로부터 서류를 지참하고 회사에 와서 직접 퇴사 절차를 밟으라는 연락이 왔다.
그런데 막 회사에 들어서자 동료들의 아첨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 부장님, 손목에 차신 시계 올해 신제품 아닌가요? 정 대표님이 정말 부장님을 각별히 챙기시네요!”
“정 대표님과 지 부장님은 천생연분이에요. 두 분이 있는 한 우리 회사도 더욱 승승장구할 거예요!”
지찬우는 일부러 머리를 긁적이며 손목의 새 시계를 자랑스럽게 내보였다.
나를 발견하고는 재빨리 내 앞으로 다가와 웃으며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정훈 선배, 드디어 오셨네요. 은서 선배가 앞으로 프로젝트 할 때 제가 힘들지도 모른다면서 직원들한테 밀크티 쏜대요, 직원들한테 저를 잘 돌봐달라는 의미로요. 선배는 뭐 드실래요?”
나는 지찬우의 손을 확 뿌리쳤다.
그런데 내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한쪽에서 차가운 시선으로 나를 조용히 지켜보던 정은서가 한 걸음 다가와 지찬우를 뒤로 감쌌다.
“한정훈, 너 출근도 지각한 주제 밀크티 마실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인사팀에 얘기해서 근태 수당 차감하라고 할 거야! 그리고 시간 개념도 없는 사람이 어떻게 프로젝트 책임자 자리를 맡을 수 있겠어? 아무래도 회사의 중요한 프로젝트는 네가 손대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제6화
“인턴부터 다시 시작해서 회사 규정 제대로 배워!”
지찬우는 일부러 놀란 척하며 정은서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그러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은서 선배, 그건 좀 너무 심한 거 아닐까요...? 프로젝트 거의 다 끝나가는데... 정훈 선배도 고생은 했잖아요.”
정은서는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허리를 꼿꼿이 폈다. 그러고는 목을 곧게 세우고 콧방귀를 뀌었다.
“직원들이 이렇게 속 좁은 사람을 리더로 두고 있으면 회사 분위기만 망쳐, 차라리 찬우 네가 혼자 하는 것보다 못해. 찬우야, 앞으로 한정훈이 하던 프로젝트는 네가 맡아. 이제부터 진짜 프로젝트 책임자는 너야.”
지찬우는 탐이 나는 표정이었지만 겉으로는 사양했다.
“은서 선배, 그건 아무래도 좀 아닌 것 같아요. 제가 아직 나이도 젊고 경력도 별로 없는데...”
정은서가 나에게 불만이 있음을 알아챈 회사 임직원들은 앞다투어 맞장구를 쳤다.
“정 대표님 말씀이 맞아요. 한 전무님이 너무 자만한 것 같아요. 어제는 야근도 안 하더니 오늘은 지각까지 하고, 엄격히 관리해야 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저는 줄곧 지 부장님이 재능 있는 인재라고 생각했어요. 한 전무님은 경력이 좀 있긴 하지만 지 부장님만 못하죠.”
정은서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더니 일부러 마지못해 은혜를 베푸는 척하며 말했다.
“일 잘하면 내가 못 이기는 척 너를...”
더 이상 사람들이 한목소리로 떠드는 걸 듣기 싫었던 나는 정은서의 말을 바로 잘라버렸다.
눈살을 찌푸리며 냉담하게 말했다.
“미안. 정 대표, 오해한 것 같네? 회사에 온 건 퇴사 신청서 접수하려고 온 거야.”
멍해진 정은서는 이내 깜짝 놀란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
인사팀 직원이 다가와 그녀 귀에 무언가 조용히 속삭였다.
그러자 정은서의 얼굴이 확 어두워지더니 눈썹 사이의 주름이 깊어졌다.
“한정훈, 너 보자 보자 하니까 이제 막 나가겠다, 이거야? 갑자기 이혼... 또 갑자기 퇴사하겠다고 비아냥거리기나 하고. 잊었어? 우리 회사, 자금 조달도 성공했고 곧 상장도 할 거야! 그때가 되면 모든 직원한테 보너스로 주식 지분도 줄 거고. 다른 사람들은 들어오지 못해 안달이 난 좋은 회사라고!”
나는 그저 냉담하게 정은서를 바라보았다.
“알아. 정 대표. 일단 퇴사 신청 빨리 승인해 줘. 안 그러면 바로 고용노동부에 신고할 거니까.”
미처 상황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한 직원들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로를 마주 봤다.
정은서는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지만 전혀 아픔을 느끼지 못한 듯 목을 뻣뻣하게 세우며 뻐기듯 말했다.
“그래, 가! 바로 승인해 줄게! 네가 떠나면 찬우를 프로젝트 책임자로 승진시킬 거야!”
말을 마친 후 인사팀 직원의 손에서 서류를 낚아챘다. 펜으로 서명하려는 듯했지만 시선은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내 반응을 살폈다.
내가 여전히 무표정인 걸 확인하자 정은서는 다시 몇 마디 덧붙였다.
“회사 상장하고 나면 찬우를 승진시키고 연봉도 인상해 줄 거야. 그뿐만 아니라 차와 집까지 사줄 거야. 회사에 공헌을 한 사람한테는 그만큼 대우해 줘야지!”
나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일부러 지찬우를 언급해 내 속을 긁고 내가 굴복하길 바란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협력사가 회사에 손해 배상을 청구하러 온 것을 정은서는 모르고 있었다. 협력사는 벌써 회사 건물 아래까지 도착한 상태였다.
올라간 내 입꼬리를 멍하니 바라보던 정은서는 약간 화가 난 어조로 말했다.
“뭐가 그렇게 웃겨?”
나는 냉담하게 말했다.
“설명은 다른 사람이 대신해 줄 거야.”
말을 마친 나는 코웃음을 치며 몸을 살짝 비켰다.
그러자 그 순간, 협력사 대표가 내 뒤에서 걸어 들어왔다.
그러더니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정 대표님, 귀사가 계약을 위반하고 프로젝트 책임자를 임의로 교체하였기에 저희 측은 투자를 철수하려고 합니다. 귀사의 상장 계획에 더 이상 참여하지 않겠습니다.”